나들이
왕온 묘
유한철
2011. 12. 2. 11:16
전 왕온 묘
- 몽고군은 일본을 정벌하고자 새로 개발한 화포를 삼별초군과 싸울 때 사용했는데 진도에서 10일 동안 벌어진 전투로 삼별초군은 위기에 몰리게 되며, 그들이 궁궐로 사용하던 용장성 큰 가람은 완전히 불타버렸다.
- 왕무덤에서 붙잡힌 왕온과 그의 아들 항의 목을 치자는 주장과 목숨을 살려 데려가자는 주장이 맞섰지만 결국 이들 부자(父子)는 적장의 칼에 목을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고려의 자주(自主)를 위해 항거하던 삼별초 정신과 몽고의 속국이 되어 자주항거집단을 토벌하러 나선 고려 개경 정부의 조카들이 진도의 이름없는 어느 산골짜기에서 몽골 장수의 고집을 꺽지 못하고 만다. 외세의 압력에 따라 조카가 백부를 죽이고 사촌 형제의 목을 치는 고려 왕실의 비극이 논수곡(論首谷)과 논수동(論首洞)이라는 이름을 남겨놓았다.
왕무덤재는 물론 왕온의 무덤이 바로 옆에 자리한 이유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고, 바로 밑에 왕이 탔던 말의 무덤이 남아 있으나 아들 항의 무덤은 남아있지 않다. 패주하던 삼별초가 돈지에서 둘로 나뉘어 김통정(金通精)은 금갑 방면으로, 배중손(裵仲孫)은 임회 방면으로 도망쳤다. 금갑에서 배를 탄 김통정, 유존혁은 제주까지 건너가 그곳에서 2년 남짓 항몽전을 펴다가 섬멸되었다.
이때 함께 도망치던 여인들은 붙잡혀 욕을 보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거두자고 마음 먹고 돈지 벌판 앞 우황천에 몸을 던져 자결의 길을 택했다. 그 뒤부터 비오는 날 지나가는 행인들의 귀에 한서린 여인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부여 낙화암과 견줄 수 있는 이야기다. 임회면 방면으로 패주했던 배중손 장군과 그 부하들은 남도진성에서 최후를 마쳤다 한다.